접어둔 생각들

기억할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싶으니까_자유기고가 임효정

달팽이여행 2013. 6. 25. 16:33

기억할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싶으니까

글 쓰는 게 좋아서. 의미 있게 살고 싶어서. 세상에 궁금한 게 많아서. 이 세 가지가 안락한 둥지를 제 발로 걸어나온 이유다.

직장에 사표를 내고 나니 하루 24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됐다. 하루 종일 백수 코스프레를 하든,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일만 하든, 이제 내 시간에 지분을 떼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. 24시간이라는 공이 전적으로 내 손바닥 위로 넘어온 것이다. 아무도 나를 채근하거나 뭘 하는지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다.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완벽한 공백이었다. 이 낯선 시간, 낯선 자유. 마음 깊은 데서 짜릿한 흥분이 피어올랐다. 생각해보니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 스스로 컨트롤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.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‘OO살 때 해야 하는 일들을 하나씩 클리어해가면서 살았다. 나름대로 회심의 도전도 하고, 뒤처지지 않겠노라 스펙을 쌓으며 버둥거렸다. 세상 사람들이 다 따르는 (것처럼 보이는) 한국 사람 특유의 인생 시간표, 내지는 매뉴얼을 거스를 자신도 없고, 강단도 없고, 방법도 몰랐다. 그래서인지 미션들을 열심히 클리어하면서도 심장 근처에는 늘 알 수 없는 불안, 씁쓸, 모호한 마음이 서성거렸다.

대학 다닐 때부터 나는 내가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. 광고홍보학과에 다니면서도 나는 늘 광고보다는 홍보를 편애했다. 광고 과목은 재미와 호기심 차원에서, 홍보 과목은 앞으로 내가 밥 벌어먹고 살 일이라는 생각으로 수강했다. ‘글이라는 매체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고, 어루만지고, 깨우고, 흔드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니. 이건 진짜 멋진 일이야라고 생각했다.

졸업을 한 달 앞두고 들어간 홍보대행사에서는 학생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고강도 라이프가 이어졌다. 사회가 요구하는 업무 강도가 그렇게 혹독한 수준인 줄 미처 몰랐던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. 대부분의 기획사가 그렇듯이 홍보대행사는 직원에게 엄청난 로드의 업무량을 소화할 것을 요구했다. 아침 9시에 시작한 업무는 밤 10~12시가 돼야 끝이 났다. 나의 주 업무는 기획기사, 컬럼, 보도자료 등 홍보물을 작성하는 일이었다. 아침 일찍 일간지 신문을 쭉 훓고 난 뒤에는 밤 늦도록 글을 썼다. 그 때 핸드폰은 터치 방식이 아니라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문자를 보내야 했는데, 퇴근 후에는 버튼을 누를 힘까지 다 빠져버려서 문자를 보내지 않을 만큼 빡세게 살았다. 녹록치 않은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나를 지탱해준 것은 거부할 수 없을만큼 유혹적인 글의 맛이었다. 글맛 내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다. 한 단어라도 더 섹시하게, 불필요한 표현을 버리기 위해 경쟁하듯 모니터를 노려봤다. 피곤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기어코 더, , 매달리는 내 모습이 어느 날엔가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보였다. 피곤하다는 것을 덜 느낄 만큼 내가 이 일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. 홍보대행사의 장점은 다양한 산업군으로 뻗어있는 고객사들을 발판으로 다양한 글을 써볼 수 있다는 것이다. 마이크로소프트, 퀄컴, LG화학, 필리핀관광청 등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의 색깔에 맞게 각기 홍보물을 만드는 일이 유레카! 그야말로 적성에 맞았다.

하는 일을 좋아하면 잘 하기도 쉽다. 회사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칭찬은 글 잘 쓴다.”는 말이었다. 좋은 글을 완성하는 일은 하나의 게임과도 같았다. 게임 결과가 성에 차지 않다 싶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말에 사무실에 나와 완성도를 높여야 직성이 풀렸다. 회사를 위해서라기보다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퀄러티 높은 자료를 만들어내고 싶었다. 부끄러운 자료를 내 이름을 대며 내밀고 싶지 않았다.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. 상사가 훌쩍 이번 글, 정말 잘 썼어라는 말을 던지고 가기라도 하는 날에는, 누적된 피로가 단숨에 포맷될 만큼 기뻤다. 상사도 상사지만 클라이언트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몇 배로 더 기뻤다. 필리핀관광청 일이 특히 재미있었다. 현실 속 나는 비록 다크서클을 휘감고 오밤중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야근녀였지만, 그리고 입사 초반엔 필리핀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, 필리핀 여행이 얼마나 판타스틱한지 알리겠노라며 온갖 홍보물을 만들었다. ,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난다. 상사 중에 화가 나면 목소리 데시벨을 한계치까지 올리고는 쩌렁쩌렁 현지 상황을 생중계하는 까칠녀가 있었다. 나는 그녀에게 걸리고싶지 않았다. 아뿔싸, 그녀에게 직접 내 글을 검사받을 일이 생겼다. 내가 쓴 글을 모니터 화면에 띄워놓았고, 그녀가 내 자리에 앉았다. 시험 발표 기다리듯 자리 주변을 서성거렸다. 5분쯤 지났을까, 그녀가 별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. “뭐 고칠 거 없는지묻자 그녀는 특유의 물기없는 말투로 한 마디 날리고 사라졌다. “없어. 내가 너 글은 잘 안 고치잖아.” 내 딴에는 까칠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.

이후 인하우스 세계가 굴러가는 모습이 궁금하여 교육회사로 홍보 담당으로 이직했다. 이를 테면 에서 이 된 것인데, 내 역할은 직접 글을 쓰는 일이라기 보다는 홍보 전략과 방향에 대한 큰 그림을 짜고 다양한 사업부서와 긴밀히 협력하는, 이를테면 사내 홍보 컨트롤타워 같은 것이었다. 홍보대행사가 따로 있었고, 나는 일이 잘 돌아가도록 관리하면 되었다회사 생활은 할 만했다매일 시계가 저녁 6 30분을 치면 직원들은 썰물 빠지듯 속속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. 교육회사는 대개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 비교적 낮았고, 여자들이 많았다. 사람들은 여자가 다니기 좋은 직장이라고 했다. 그러나 나는 슬펐다. 더 이상 글을 쓸 필요가 없다는 내 포지션 때문이다. 사사, 브로슈어, 임원진 연설문, 서면 인터뷰 답변지 등 글을 쓸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. 글 쓰는 일을 주로 하는 직업을 가진 기자나 홍보대행사 직원들이 부러웠다. 항상 다이나믹한 일상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을 만나고 부딪히며 사는 게 버릇이 되서 그런지, 인하우스 생활은 내게 단조로웠다. 교육회사들끼리 특별히 교류를 하는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. 세상 밖이 궁금해 홍보인들의 모임에 나가곤 했지만 그것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. 11시에 퇴근하나 저녁 6 30분에 퇴근 하나, 피곤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도 놀라웠다. 저녁 6 30분 퇴근하고 집에 오면 8. 밥 먹고 쉬고 TV 보다 보면 내일을 위해 서둘러 자야할 시간이다. 퇴근 후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겠다며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여러가지 해봤지만, 결국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회사 생활이 의미 있어야 이 갈증이 씻길 것 같았다. ‘나는 세상 여기저기가 궁금해. 좀 힘들고 오랜 시간 일해도, 내가 좋아하는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의미 있게 살아야겠어.’ 이게 내 결론이었다. 그리고 회사를 나왔다.

회사를 나왔다는 말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. ‘부럽다는 쪽, 그리고 먹고 살 수 있는거야?’라고 조심스럽게 묻는 쪽이었다. 부러움과 우려의 시선을 번갈아가면서 받았다. 3년간의 자유기고가 경험을 푹 떠내어 요약보자면, 그렇게 부러워할만 하지도, 생각보다 빈곤하지도 않다. 수입은 들쑥날쑥이지만, 회사다닐 때보다 약간 많이 버는 수준은 된다. 앞으로도 그럴지는 전혀 모르겠다. 자칫하면, 그리고 언제라도 백수가 될 수 있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. 그래서 나는 나를 한계선까지 내몬다. 더이상 4대 보험도 퇴직금도 없는 나는 직장인들보다 몇 배로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.

자유기고가로 산 지난 3년을 돌이켜본다. 두 배 이상 오랜 기간 다녔던 직장생활보다 더 많은 필름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. 기억할 것이 많은 삶. 이것이 내게 의미 있는 삶이다. 지내온 시간이 의미있다고 느껴질 때 시간은 천천히 간다.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3년은 꽤나 성공적이었다. 다 차치하더라도,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.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. 천장 뚫린 곳에서 세상 곳곳에 눈과 마음을 맞추고 카메라를 가져다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. 그리하여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의 부럽거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의 궤도를, 수많은 진흙탕과 절벽 근처를, 오늘도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걷고 있다.